훨씬 늦은 조선이라는 과거를 가진 국민이 할말은 아니지만,일본의 근대화가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던건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제임스 와트가 1700년도 중후반에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영국에서 먼저 산업혁명이 터지고,유럽대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난리통이라 1800년대 초에나 그 소식이 뒤늦게 전해져 합류를 했는데,네덜란드와 계속해서 교류를 했던 일본의 입장에서 적어도 1820~30년대에는 그 소식이 인지가 되어 유럽의 기술력을 인식해야 하는거 아닌가요?1840년에 아편전쟁으로 인해 도쿠가와 막부에서도 강한 위기의식은 가졌던건 아는데그렇다면 1820년즈음으로 네덜란드를 통해 소식이 전해졌다면 그로부터 거의 40~50년정도 후에야 1868년 메이지유신을 했다는거면, 시기적으로 비유를 했을때 한국기준 1960년대 1차 5개년 계획에서 2002년 4강 월드컵에 정도의 시기차이 같습니다.즉 상당히 뒤늦었고 본인들도 이것을 인지해서 메이지유신때 급하게 개혁, 개방을 한걸로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순수 궁금한건 왜 이렇게 공백의 기간이 길었나요? 익히 도쿠가와 막부에서 쇄국을 너무 강하게 해서라고는 들었는데 관련해서 참고할만한 책이나 자료가 어떤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책이야 일본사 관련 서적. 특히 일본 근대사 서적을 찾아보면 될 것이고, 간단히 쓰자면 이유는 크게 둘입니다.
먼저, 강호막부 시대 일본에 난학이라는 게 있기는 있었지만 이게 지배층 대다수가 공유하는 학문이라거나 한 게 아니었습니다. 조선으로 치면 실학과 비슷한 것이죠. 실제로도 막부 말기에 유럽인들을 박해하는 정책을 폈다가 난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반발하는 등의 일도 있었고, 결국 쇄국정책이 무너진 것도 난학이 아니라 미국의 함포에 의한 것이었고요.
둘째로, 1820년대와 1860년대, 1960년대와 2000년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합니다. 교통과 통신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니까요. 19세기 중~후반에 지구 반대편까지 소식이 전해지는 데 40년 정도 걸렸다... 라고 하면 그닥 느린 건 아닙니다.